「우리가 가진 건 없습니다」
무풍지대를 탈출한 남해의 검은 여우 해적단은 기적처럼 얻어진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항해를 계속했다. 술은 없었지만 희망은 넘쳤다.
그러던 그날 오후, 조타수 윌리가 외쳤다.
“선장님! 동쪽 2리 밖에 호위선도 없는 외로운 상선 발견!”
“정말이냐?!”
선장 배로우 잭은 망원경을 들었다.
은빛 선체, 빛나는 갑판, 그리고 어딘가 귀한 냄새.
“...금이다. 아니, 향신료다. 후추다...!”
선원들이 벌떡 일어났다.
“후추요?!”
“그거 있으면 비스킷에 뿌릴 수 있어요!!”
“비트남 후추인가요? 인도산인가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값진 물건임엔 틀림없다. 상선이라면 약탈이 기본이요, 원칙이요, 윤리다!”
“워호오오오오오오!!!”
블러디 메이벨린은 돛을 가득 펼쳤고, 양현에서 해적 깃발이 날렸다. 선원들은 칼을 휘두르고, 뱃노래 대신 공격용 구호를 외쳤다.
“삥 뜯자! 뺏자! 귀족만 곱게 죽자!!”
상선은 별다른 저항 없이 멈춰섰고, 해적단은 일사불란하게 접근했다. 그리고 선장 잭은 멋지게 도약해, 상선의 갑판 위에 착지하며 외쳤다.
“너희가 가진 거, 전부 내놔!!!”
상선 선장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가진 건 없습니다.”
“…뭐?”
“여기 실린 은잔, 도자기, 후추, 육두구, 모카 원두 전부 왕국 국왕 폐하의 소유물입니다.”
“...왕이 향신료를 왜 가져?”
“글쎄요, 저도 모릅니다. 그냥 상인이 그리 말했어요.”
“그럼 배는?”
“배는 해군참모총장이 무역회사에 위탁시킨 국유선박입니다.”
“…그럼, 너희는 누구냐?”
“월급 3실링짜리 계약직 선원들입니다. 이 옷도 제복이 아니라 회사에서 할부로 대여한 겁니다. 옷값 떼고 나면 한 달에 럼주 한 병도 못 삽니다.”
“...”
“게다가, 이 항해가 끝나면 우리는 임시 해고가 예정돼 있습니다. 대기 명령서에 서명하셨거든요?”
“뭐... 뭐라도 개인 물품은 있겠지. 항해용 나침반, 구리 컵, 돛 닦는 걸레 같은 거라도?”
“모두 회사 자산입니다. 반납 안 하면 급여에서 삭감당해요.”
“...그럼, 네 목에 걸린 목걸이는?”
“선물 받은 겁니다. 하지만 그 선물도 회사가 ‘업무 중 사용한’ 것으로 간주해 압수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너한테 남은 게 뭐냐?”
상선 선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한 쪽 팔에 있는 화상 자국과, 고향 여인의 이름을 새긴 문신입니다. 그 둘은 아직 제 것이죠.”
해적단 선원들이 고개를 떨구었다.
누군가는 럼주 뚜껑을 닫았고, 누군가는 조용히 칼을 칼집에 넣었다.
토미는 속삭였다.
“…진짜 가진 게 없네. 무풍지대보다 더 허무하잖아...”
선장 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약탈하러 온 게 아니라, 보고 배워야 할 곳에 온 거였군.”
그는 상선 선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됐어. 너희의 유일한 소유물, 자존심과 문신은 지켜주지.”
“감사합니다.”
“자, 돌아간다! 무풍지대도 버틴 우리가, 무소유 상선 앞에서 무릎 꿇을 수는 없다!”
“워호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날 밤, 블러디 메이벨린의 선원들은 배 위에서 회의를 열었다.
“결론: 무역회사가 진짜 해적이다.”
“맞아. 우린 양반이었어.”
“그치만 럼주가 더 필요해.”
“그래도 다음엔 진짜로 뭔가 가진 배를 털자...”
그리고, 돛을 바람에 맡긴 그들은 다음 사냥감을 찾아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물론, 다음 배도 ‘무역회사의 자산’이란 건…
며칠 뒤에 알게 된다.